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윌리엄 리히 (문단 편집) == 생애 == 1875년 5월 6일 [[아이오와]]의 햄턴에서 [[아일랜드계 미국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마이클 리히는 [[남북전쟁]] 참전용사 출신 변호사였다. 아버지를 따라 [[미국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려고 하였으나 대신 [[미국해군사관학교]]에 진학했고 1897년에 47명 중 14등으로 졸업했다. [[준사관]][* 당시에는 바로 해군소위로 임관하지 않고 1-2년 정도 견습사관(준사관)으로 근무한 뒤에 소위 임관시험을 쳐서 정식으로 임관했다. 이것은 범선시대에서부터 내려진 오랜 관례였다.]으로 [[미국-스페인 전쟁]]에 참전했고 [[태평양]] 쪽에서 근무했다. 1899년에 정식으로 소위 임관이 된 후 [[미국-필리핀 전쟁]]과 [[의화단 사건]] 등에 참전했고 1907년 해사로 돌아왔다. 이때가 첫 육상직이었다. 이 후 행정 보직으로 워싱턴에 근무하던 중 1913년에 해군차관보로 부임한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함께 일하면서 둘은 점차 친구 사이로 발전하게 된다. 이때의 인연으로 리히는 루스벨트의 최측근이 된다. 후에 여러 요직을 역임하면서 오랫동안 루스벨트의 조언가로서 군사적, 전략적 안목을 형성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후 1차대전이 종전된 1918년 대령 계급으로 지낸다. 1927년에 [[제독]][* 당시 미 해군엔 준장 계급이 없었고, 대신 대령 계급에서 거의 10년 이상 지내고 바로 2성제독(해군 소장)으로 진급하는 식이었다. 현재의 준장급 제독들이 맡을만한 보직들은 근속년수가 높은 고참 대령들이 맡고, 이 고참 대령들은 타군의 준장급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그러다 태평양 전쟁이 터지고 해군 군사력과 해군 장병의 정원이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제독 보직의 수도 많아지면서 1943년에 준장 계급이 신설된 것.]이 되었고 1937년에 대장으로 진급하였으며 1939년까지 [[해군참모총장]]을 지냈다. 1939년에 전역한 뒤 [[푸에르토리코]] 총독으로 파견되었고 [[프랑스]]에 대사로 파견되기도 했는데 이 때 루즈벨트는 도움이 필요할 때 다시 복직시키겠다며 전폭적인 신뢰를 그에게 전하였다. 결국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이 뒤집어지자 1942년 리히는 다시 현역으로 복귀했고, [[해군참모총장]]인 [[어니스트 킹]]과 [[육군참모총장]]인 [[조지 마셜]], [[공군참모총장|육군항공대사령관]]인 [[헨리 아놀드]]를 통솔하고 대통령에게 군사적 자문을 할 자리로 신설된 '최고사령관 참모총장'이 되었다. 해군 대장인 리히가 제복군인으로 최고 지위에 오른 이유는 당시 각군의 참모총장들보다도 고참이었고 루스벨트 대통령의 신임도 있었겠지만, 규모와 정치적 영향력이 큰 육군이 통합 직책을 이용하여 해군을 자기들 밑으로 두려는 것 아니냐는 해군의 우려 섞인 반발을 사전에 무마하려는 정치적인 의도도 있었다.[* 전후 [[미 국방부]]가 장설될 때도 국방부의 [[육방부]]화를 우려한 해군의 저항 탓에 해군장관 제임스 포레스털을 초대 국방장관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1944년 12월 15일에는 해군 원수로 진급했는데 이는 미군 전체(특정 군종이 아닌 육해군 전체)의 첫 원수였다.[* [[원수(계급)|원수]] 계급을 도입하면서 서열을 확실히 하기 위해 리히를 시작으로 7명의 원수를 하루 간격으로 임명했다. 리히가 최선임으로 임명되었고, 이어 육군참모총장 [[조지 C. 마셜]] → 해군참모총장 [[어니스트 킹]] → 태평양 방면 연합군 최고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 미국 태평양 함대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 유럽연합군 최고사령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육군항공대 최고사령관 [[헨리 아놀드]] 순으로 임명되었다.] 사실상 승전이 확정된 1945년에 리히는 일본에 대해 '지금 하던 대로 [[해상봉쇄]]와 [[폭격]]으로 압박하면 언젠가 항복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일본에 상륙해 본토를 점령하는 [[몰락 작전]]이나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원폭 투하]]에는 불필요한 인명피해를 초래한다 생각해 반대했으며, 특히 원자폭탄에 대해선 매우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일각에선 리히는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최측근을 넘어 가장 신뢰하던 친구였기에 그의 조언을 듣고 루즈벨트가 생전에 태평양전쟁에 종지부를 찍을 몰락 작전이나 원폭투하 모두 망설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해 루즈벨트가 서거하고 [[해리 S. 트루먼]]이 새 대통령이 되어 리히의 영향력이 크게 줄고, 일본인과 일본 군부가 결사항전을 다짐해 미군의 엄청난 손실이 확실시되면서 리히의 굳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원자폭탄을 투하하게 되었다. 전후 1949년 최고사령관 참모총장 자리를 [[오마 브래들리]]에게 이임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83-R86965%2C_Potsdamer_Konferenz%2C_Gruppenbild.jpg]] 뒷줄 가장 왼쪽에 서 있는 사람이 리히 제독이다. 앞줄은 왼쪽부터 영국 총리 [[클레멘트 애틀리]](1883-1967)[* 1945년부터 1951년까지 총리. 노동당 소속. 전임자는 [[윈스턴 처칠]]이었고 후임자도 처칠이었다.], 미국 대통령 [[해리 S. 트루먼]], 소련 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이고 뒷줄은 리히 본인, 영국 외교장관 어니스트 베빈(Ernest Bevin, 1881-1951)[* 노동당 소속], 미국 국무장관 제임스 번즈(James F. Byrnes, 1882-1972), 소련 외교장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뱌체슬라프 미하일로비치 몰로토프]](Вячесла́в Миха́йлович Мо́лотов, 1890-1986)이다. 자서전으로 『I Was There』를 남기고 1959년 7월 20일에 사망했다. 그의 업적을 기려 리히급 미사일 순양함 네임쉽에 그의 성이 붙었다. 아들인 윌리엄 해링턴 리히(William Harrington Leahy, 1904-1986)도 미국해군사관학교(1927년 졸업)를 나와서 해군 소장까지 지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